아내에게 다시 연애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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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69회 작성일 2005-02-03 15:03본문
아내에게 다시 연애편지를 씁니다 | |||||||||||||||||||||||||||||||||||||||||||||||||||||
영화 <클래식>을 보고 그 시절의 편지를 꺼내보았더니... | |||||||||||||||||||||||||||||||||||||||||||||||||||||
나이가 들면 누구나 소중한 보물 상자 하나쯤은 있기 마련입니다. 보물 상자 안에는 어린 시절 지치도록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들이 이제는 낡고 부서진 모습으로 들어있을 수도 있고, 학창시절 부모님과 선생님 몰래 비밀스럽게 썼던 일기장들이 지나간 세월의 지층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몹시도 좋아하는 이라면 이제는 추억의 이름이 되어버린 영화배우들이 나오는 오래된 영화들의 전단들과 포스터들을 모아놓았을지도 모르고, 번번이 신춘문예에 떨어지기만 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작가 지망생이라면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낙선 작품들을 그 보물 상자에 소중히 간직하면서 햇빛 볼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에게도 그런 보물 상자가 하나 있지요. 그러나 그 보물 상자 안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장난감도 일기장도 아닙니다. 영화를 몹시도 좋아해 영화 전단들과 포스터들을 부지런히 모으긴 했지만 뉴질랜드로 이민 오면서 모두 버렸고, 신춘문예에서 미역국을 먹은 작품들은 내 컴퓨터 안으로 모두 이사를 시켜서, 내 보물 상자 안에는 구겨진 영화 전단들도 빛바랜 원고지들도 이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의 집에 불이 나서 단 하나의 물건만 가지고 나올 수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나오겠는가?"하고 영어 교실의 키위 선생님이 물었을 때, 아내는 주저없이 "연애시절 남편에게서 받았던 편지들"이라고 대답했을 정도로 그 보물 상자는 아내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런 질문을 받았더라도 마찬가지 대답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소중한 보물 상자지만 그것을 열어보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보물 상자를 자주 열어보면 그 신비한 매력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의 보물 상자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습니다. 책꽂이 맨 아래 서랍장에 깊숙이 놓아둔 내 보물 상자는 빛을 못 본 지 오래되었고 아내의 보물 상자도 옷장 선반 위에서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잠자던 보물 상자들을 어제 일요일 오후에 열어보았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보았던 영화 <클래식> 때문이지요. 매달 두 편씩 한국 영화를 무료로 상영해주고 있는 뉴질랜드 한국영화회의 9월 첫 상영 작품이 바로 곽재용 감독의 <클래식>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대학에 다니는 딸(지혜-손예진 분)이 다락방에서 발견한 엄마의 보물 상자에 담긴 편지들과 엄마가 사랑했던 이(준하-조승우 분)가 남긴 일기장에서 엄마의 아픈 첫사랑을 읽게 되는 것처럼 먼 훗날 내 딸아이도 엄마와 아빠의 보물 상자에서 발견한 편지들을 읽고서 우리의 사랑을 알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오후에 보물 상자들을 꺼내 그 많은 엽서들과 편지들을 하나하나 들춰보았습니다. 5년 6개월의 연애기간 동안에 아내가 내게 보낸 엽서는 100여 장이나 되고 편지도 50통이 넘더군요. 그런데 내가 아내에게 보낸 것은 더 많아서 엽서가 120장이 넘고 편지가 70통이나 되더군요. 너무나 많아서 다 읽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우선 아내가 내게 보낸 엽서와 편지들을 날짜순으로 정리하여 읽었습니다. 그 안에는 고스란히 우리 청춘의 시간이 들어 있었습니다. 눈부신 첫사랑의 떨림이 간직되어 있었고 헤어짐이 잦았던 우리 사랑의 아픈 흔적도 있었고 마침내 확인된 서로의 사랑에 대한 굳은 맹세도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먼저 말을 못하고 있던 내게 무수한 별들과 네 잎 클로버 한 장을 함께 보내준 그녀의 이 아름다운 엽서는 너무나 큰 기쁨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엽서 속에서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알아보았고 그래서 답장을 보냈지요. 그 답장에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밤마다 네가 별을 그리는 걸 보았어." "……." "그런 날이면 네 머리맡에서 네 꿈을 지켜주고 싶었어." 그리고 그는 조그맣게 웃었다.
그녀와 만나고 처음 맞이하는 1985년 겨울. 바람은 차가웠지만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의 본문을 엽서에 옮겨 적어 그녀에게 보내는 나의 손과 세 달 동안 계속된 56장의 그 엽서들을 모아 하나의 엽서책으로 묶은 그녀의 손은 조금도 시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린왕자가 사막에서 만난 여우를 길들인 것처럼 그녀를 길들였고 나 역시 그녀에게 길들여졌지요. 그 길들임 속에서 우리는 눈부신 사랑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기쁨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우리는 여러 번 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말다툼은 자주 결별 선언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헤어짐은 늘 그녀의 사과 편지 또는 나의 사과 엽서와 함께 다시 만남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헤어지고 만나기를 하도 자주 하다보니 처음에는 실연 당한 나에게 위로주를 사주기도 했던 주위의 친구들도 이제는 내 말을 믿지 않을 지경이 될 정도였습니다. 이 모든 지나간 우리 사랑의 이야기가 그녀의 편지와 엽서들을 읽어나가는 동안 내 눈 앞에 다시 펼쳐졌습니다. '보고 싶어!'라는 단 네 글자를 대학노트 가득 파란색 매직펜으로 써 보낸 그녀의 편지를 다시 보는 순간, 왈칵 내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래, 옛날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니 어때? 좋아?" 나는 그저 그윽한 눈길로 아내를 쳐다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내가 더없이 아름다워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늦도록 우리의 연애시절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침대에 누우면 10분도 안 되어 코를 골아대며 잠이 들던 나도 어젯밤에는 잠이 저만큼 달아났습니다. 마침내 아내가 말하더군요. "신랑, 앞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옛날 편지들을 읽어라, 오늘밤 너무 좋다." 아내의 말에 나는 정말 그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냥 웃어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달에 한 번씩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오히려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많은 우리의 편지와 엽서들이 거의 모두 결혼하기 전 연애시절에 주고받은 것들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지요. 각종 기념일에 주고받은 카드들을 빼고는 결혼 후에 아내와 내가 주고받은 편지는 겨우 두세 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라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아내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오늘 저녁 그 첫 편지를 아내에게 씁니다. 그대여,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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